이즈음에서는 물길이 좁아져 강 아래의 하얀 모래밭은 볼 수 없다. 대신 깊은 산속의 계곡처럼 자연 그대로의 강줄기를 탐닉할 수 있다. 그 흔한 논 한 마지기도, 밭 한 뙈기도 없는 산기슭을 에돌아가는 길은 나그네의 들뜬 마음을 달래기 충분할 정도로 평탄하다. 화개 삼거리에 약간 못 미친 곳에 있는 아주 오래된 쉼터. 강으로 바짝 붙은 언덕에 있는 이 쉼터에는 27년째 재첩국수를 말아내는 부부가 살고 있다.
혹시 주인 내외가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하지 않는 것인지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때 아주머니가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찾은 여행자를 반가이 맞으신다. 걸음을 옮기는데 눈에 익은, 가게와 주방으로 쓰던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2년 전, 예전의 낡은 트럭은 버티다 못해 내려앉는 바람에 철거했단다. 대신 방도 한 칸 넣은 번듯한 조립식 가게가 새로이 생겼다. 트럭은 이미 주인 내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 아니 삶 그 자체였으리라. 예전 트럭이 있을 때에는 그 안에서 잠도 자기도 하고, 음식도 만들고, 갖은 산야초 등의 물품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기도 했다.
날씨라도 좋으면 쉼터 이곳저곳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말아내는 국수를 먹는 맛이 그만이었다. 행여 날씨라도 추우면 강변 언덕 아래에 얼기설기 지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국수를 먹고는 했다.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을 등지고 따뜻한 햇볕이 넘치는 강변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국수 한 그릇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곳이 생겼으니 편리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허름한 비닐하우스에서 먹는 국수가 가끔 그립겠지만 섬진강 풍경은 변함없으니 애써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사치이리라.
거기다 주인 내외가 만든 평상 몇 개가 느티나무 아래 강변 쪽으로 놓이면서 강을 품는 곳이 되었다. 아마도 이곳만큼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국수를 먹으면 섬진강이 맛국물이 된다. 아주머니는 푸른 섬진강에 국수를 말아내고 손님은 맑은 섬진강을 들이키는 셈이다. 알알이 통통한 재첩과 총총 썬 신선한 부추, 진한 육수, 접시에 덤으로 내놓은 국수면, 잘 익은 묵은지, 매실 장아찌, 아삭한 열무 등을 함께 먹고 나면 비싸다는 생각은 싹 가시게 된다. 재첩국수를 먹는 순간, 누구든 국물 하나 남김없이 그릇을 비우게 된다.
음식이 맛깔스럽기도 하거니와 국수와 반찬을 내오는 그릇은 묵직하면서도 깨끗한 사기그릇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아주머니의 정갈함은 여전하다. 게다가 섬진강 풍경까지 덤으로 있으니. 섬진강을 오가며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늘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국에서 유일한 섬진강 재첩국수를 오래도록 맛볼 수 있을 터다. 산 그림자 저무는 섬진강을 보며 오늘도 난 재첩국수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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