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인)

곽해룡 시인의 동시

blueroad 2011. 7. 4. 17:01

 

 곽해룡 동시집

 

 ‘시인의 말’

 제 동시집 《맛의 거리》와 《입술 우표》가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면,

 이 책 《이 세상 절반은 나》는 한 발 한 발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애벌레에게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주려고 배려하면서 썼습니다.

 저는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구로 지역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공장 일은 더럽고 위험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조금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장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치거나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무렵 읽은 동화책이 트리나 폴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호랑 애벌레는 먹고 자라는 것 이외의 다른 삶이 있을 거라 믿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올라가려는 기둥을 발견한 호랑 애벌레는 그 기둥 너머에

 희망이 있을 거라 믿고 기둥을 오르다가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사랑에 빠진 둘은 기둥을 내려오지만 호랑 애벌레는 기둥 너머의 세상을 보지 못한 걸

 후회하며 노랑 애벌레를 두고 혼자서 다시 기둥을 오릅니다.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기둥을 오르던 호랑 애벌레는 자신이 고생해서 올라온

 기둥이 수천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기둥을 내려와

 나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책을 읽고 저는, 자신이 하늘 높이 치솟은 기둥을 오르고 있는 호랑 애벌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부터, 나는 기둥의 어디쯤 올라와 있을까, 고민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제가 오르던 기둥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둥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이제 기둥을 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높은 곳까지 오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나도 노랑 애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 기둥에서 내려왔습니다.

 기둥에서 내려오는데 그동안 애써 올라온 게 아깝기도 하고,

 다른 애벌레들과 등지고 걸어야 하기에 외로웠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은 그런 저를 걱정하기도 하고, 높이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둥에서는 내려왔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나비가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나비가 되기 전에 꽃들이 다 시들어 버리면 어쩌나, 조바심치면서 오랜 세월을 방황했습니다.

 그 오랜 방황 끝에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몸에 날개가 돋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애벌레이던 제가 나비가 된 것입니다.

 기둥에서 내려온 뒤부터 저는 더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꾸 어려져서 열네 살, 열두 살, 어떤 때는 다섯 살이 되기도 합니다.

 제 시를 만나는 것은 어른인 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머나먼 어느 별에서 온 어린 왕자처럼 40년 세월을 훌쩍 건너온 제 어린 영혼을 만나는 것입니다.

 3학년 경태, 4학년 정행이, 5학년 가림이, 6학년인 종승이…….

 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제 어린 영혼과 놀아주고 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커 가는 아이들이 남루하기 그지없는 제 어린 영혼과

 사이좋게 잘 지내 주어서 늘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 동시집을 미리 읽고 격려글까지 보내 준 서지민 어린이와 가수 김광진 선생님,

 독서운동가 권화빈 선생님과 동화작가 장주식 선생님, 어눌한 제 언어들을

 세상에 고할 수 있도록 오와주신 우리교육 편집부와 예쁜 그림을 그려주신 황수민 선생님,

 애벌레이던 저에게 나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 주신

 트리나 폴러스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은 산돌교회 박춘노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저보다 먼저 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랍니다.

 제가 가진 재주를 부와 권력을 쌓는 데 쓰지 말라고 일러 주신

 박춘노 목사님과 젊은 날을 함께 방황하던 구로지역 벗들, 꽃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는

 모든 나비들과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벌레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통일염원 67년 봄

 가리봉 오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관악산 기슭에서

 곽해룡

 

 

 ‘이 세상 절반은 나’

 

 이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엄마는 못 말려'

 

 내가 수학 백점 맞은 날

 엄마는

 팔십 점 맞은 은수네 엄마랑

 구십 점 맞은

 지호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몇 점 맞았는지 물어 본다

 

 내가 팔십 점 맞고

 은수랑 지호가 백점 맞은 날

 엄마는

 은수네 엄마

 지호네 엄마한테 전화 올까 봐

 전화기를 꺼둔다

 

 

 ‘할머니 소원’

 

 할머니 소원은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볕 잘 드는 곳에 묻히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평생 개펄을 파먹고 사셨다는 할머니는

 돌아가시면 한 줌 가루가 되어

 낙지 고등 꼬막에게도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염소를 먹이기 위해 길러지는 풀처럼

 사람을 먹이기 위해 길러지는

 고추 마늘 콩처럼

 하느님이 사람을 기르는 이유는

 누구에겐가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사람이 늙는 것은

 먹기 좋게 익어가는 밤 대추 감처럼

 물고기가 먹기 좋게

 낙지 고등 꼬막이 먹기 좋게

 익어 가는 거라 하셨습니다

 

 

 ‘쥐꼬리’

 

 오늘은 우리 엄마

 쥐꼬리 받는 날

 

 엄마는 월급을 쥐꼬리라 한다

 소꼬리라면

 곰탕이라도 끓여 먹을 텐데

 족제비꼬리 여우꼬리라면

 목도리라도 하고 다닐 텐데

 개꼬리도 다람쥐꼬리도 아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쥐꼬리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 쥐들이 엄마 쥐의 꼬리를 물고

 이사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위험한 집을 버리고 새로 살 집을 찾아가는

 어린 쥐들에게는

 털도 없고 때에 전 엄마 쥐의

 그 길고 징그러운 꼬리가

 동아줄보다 든든하고

 털목도리보다 따뜻했겠지

 

 오늘은 우리 엄마

 쥐꼬리 받는 날

 

 

 ‘물집’

 

 내 집 마련이 소원이라던 어머니

 오늘

 집 한 채 장만하셨다

 

 공원 꽃밭

 풀 뽑는 희망근로

 노인들 일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삼만 삼천 원이 어딘데, 하며

 열심히 풀을 뽑았다는 어머니

 오늘

 소원 하나 이루셨다

 

 호미를 쥐었던 손바닥에 잡힌

 집 한 채

 

 물집

 

 

 ‘자장자장’

 

 자장자장 자장자장

 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내가 잠 안 온다고 떼쓰면

 할머니는 자장가 불러 주셨다

 

 우리 세은이 잠들며는

 꽃밭에다 눕혀 주고

 못된 대욱이 잠들며는

 개똥밭에 눕혀 주마

 

 친구랑 다투고 잠 못 드는 밤

 할머니 자장가 들으면

 친구에 대한 미움도 싹 가셨다

 

 자장자장

 오늘은 내가 할머니한테

 자장가 불러 드린다

 

 사진 속 웃고 계신

 우리 할머니 자장자장

 자장자장 오늘은

 할머니 제삿날

 

 

 ‘할머니는 아직도’

 

 할머니는

 맛있는 음식 보면

 아빠 앞으로 밀어 준다

 

 할머니는

 출근하는 아빠 등에 대고

 조심해라, 한다

 

 할머니 눈에는 아빠가

 아가로 보이는가 보다

 

 아빠만 보면 할머니는

 아직도

 젖이 도는가 보다 

 

 

 ‘엄마 보러 갔다가’

 

 엄마 보러 갔다가

 오징어만 보다가 왔습니다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못 본 척

 왔다 갔다 하는 오징어

 

 엄마도 나를 못 본 척

 바쁘게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엄마를 못 본 척 나도 혼자 놀다가 왔습니다

 

 엄마가 일하는

 횟집 수족관 앞에서

 

 

 ‘가시물고기’

 

 누군가를 미워하는 동안

 내 몸 속에서는

 조금씩

 가시가 자라났다

 

 미워하는 친구를

 찌르고 싶어

 지느러미 끝에 숨겨 둔 가시를

 치켜들 때마다

 내 몸 속 가시는

 점점 자라났다

 

 친구의 몸에 상처가 나고

 아파하기를 바라는 동안

 내 몸 속 가시에

 콕콕 살을 찔러

 나만 아팠다. 

 

 

 ‘방귀’

 

 친구들 모르게 뀌려고

 조심, 조심

 교실을 나오다가

 

 어쩌나,

 도로 들어가 버린

 아까운 내 방귀

 

 

 ‘똥’

 

 소가 눈 똥

 쇠똥구리가 먹고 잘 큰다

 

 염소가 눈 똥

 풀이 먹고 잘 큰다

 

 사람이 눈 똥

 아무리 먹어도 변기는 안 큰다

 

 

 ‘바지랑대와 빨랫줄’

 

 바지랑대가

 빨랫줄을 받쳐 주고 있다

 

 빨랫줄이

 바지랑대를 붙들어 주고 있다

 

 혼자서는 서지도 못하는 바지랑대가

 혼자서는 축 늘어지는 빨랫줄이

 

 팽팽하게

 하늘을 받들고 있다

 

 

 ‘발문’

 

 남자, 젖의 상상력

 

 김권호(어린이문학평론가, 서울 우이초등학교 교사)

 

 곽해룡 시인은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약한 존재들에게

 “젖이 도는”(<할머니는 아직도>)사람입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놀랍습니다.

 남성에게도 모성에 필적할 만한 어떤 성질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젖의 상상력으로 나타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번 동시집은 눈 밝은 시인의 전매특허 같은 감각적 이미지가 여전히 반짝이지만,

 내 마음을 자꾸만 멈칫거리게 하는 것은 바로 몇 편의 젖 이미지와 관련된 동시입니다.

 그는 이제 통념의 남성성의 한계에 갖혀 있지 않고 내면에 숨어 있던 아니마를 끌어냅니다.

 저는 이를 ‘남자, 젖의 상상력’으로 읽으려 합니다.

 <고양이를 조심하세요>에서 쓰레기 봉지를 물고 차 밑에 들어간 “퉁퉁 젖이 불은”

 어미 고양이가 먹는 음식은  “새끼 고양이 울음을 달랠 젖”을 위해서입니다.

 어미 고양이의 먹이 획득 장면은 “엄마! 엄마! 새끼 고양이가 어딘가에 숨어 젖 보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급합니다. 그런 어미의 마음자리는 <자운영>에서 한층 확대됩니다.

 흙속에 파묻혀 기름이 되기 위해 길러진 자운영은

 “트랙터가 도착하기 전 / 벌 나비 어서 / 배부르게 젖 먹으라고”

 “젖꼭지 수만 개”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밉니다.

 젖을 먹이려는 어미들은 그러나 급박한 벼랑 끝에 몰려 있습니다.

 어미 고양이가 있는 자동차 밑은 곧 차가 출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며,

 그래서 시의 제목은 “고양이를 조심하세요”입니다.

 자운영 역시 트랙터가 도착하면 그만 뒤집어져 뿌리채 뽑히고 말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에서도 책임 있는 어미가 되려는 동시인의 마음이 간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오죽하면 시인은 “봄 하늘 뒤덮은/ 저 흙먼지”인 황사까지도

 “풀 나무에게 / 젖 물리고 싶어”(<황사>)오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젖 물리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는 “찌부러진 콩들은/바가지에 따로 모어” 혹시나

 그런 것들도 싹이 틀까 싶어 “밭가에 묻어 주”(<낮달>)기도 하고,

 “갈팡질팡 / 제 설 곳을 찾지 못”해 “어린 홍학이 금방이라도 / 으앙,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홍학 공연>) 안아주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사람이 늙는 것은 / 먹기 좋게 익어가는 밤 대추 감처럼 / 물고기가 먹기 좋게”(<할머니 소원>)

 익어가는 것으로, 산에 안겨 있던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보며

 “어느새 산이 / 폭삭 늙어”(<늙은 산>)뵌다고도 합니다.

 급기야는 “제 몸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

 개똥벌레는 / 벌레도 아니다”(<개똥벌레-전태일>)라며 전태일 열사를

 “밤하늘에 / 불을 지르는" 개똥벌레로 환생시킵니다.

 어미란 본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일 터입니다.

 이처럼 어리고 못생기고 못나고 늙은 것을 바라보는 그의 진지한 시선은

 동시대의 다른 동시인들에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삶의 속내를 아는 사람의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 진정의 표현이 젖의 상상력으로 나타난 것으로 저는 읽습니다.

 그 외에도 새로 심은 나무의 버팀목을 “죽은 나무가 / 산 나무를 / 단단히 붙들어 주고 있다”

 (<버팀목>)거나, 애기똥풀 꺾는 오빠에게 “그건 / 똥이 아니라 / 피일지도 모른다”(<애기똥풀>)하고,

 “별이 / 땅으로 뛰어내린다 / 하늘나라에도 /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닌지"(<별똥별>)살피는

 놀라운 성찰을 담은 동시들도, “공기에 닿자마자 / 토독토독 / 부화한 알들 / 차르르르 /

 새 떼가 되어 날아간다”처럼 오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은 동시도

 이 시집 안에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풍성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시편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 닿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곽해룡 시인의 뭉클뭉클 솟아나는 젖은 어린 독자들을

 “달처럼 해처럼 / 다시 둥글게 자라”(<네모 난 수박>)나게 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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