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화 고려의대 교수 5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암과 즐겁게 싸우기로 했다 18번의 항암치료 동안 의사시험 공부·뜨개질로 우울증을 극복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면 소중한 시간이 된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정말 괜찮을까요?”
회진을 하고 나오면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내가 진료를 맡고 있는 한 여대생의 어머니다. 딸은 난소암이었다. 의사들은 이 환자처럼 항암제 치료 효과가 좋고 완치될 가능성이 크면 “좋아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개는’이라고 단서를 단다. 의학에 100%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어머니께 그런 차가운 단서를 달 수가 없었다. 16년 전 내 어머니의 혼이 빠진 듯한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의대 본과 3학년이던 나는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난소암이라고 했다. “난 아직 공부밖에 해본 일이 없는 스물두 살인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암은 나와 내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항암제 치료는 괴로웠다. 누가 이 고통을 대신해주지 못하는 괴로움이었다. 밤새 토하다가 핏기없이 핼쑥한 얼굴로 해돋이를 볼 때도 있었다. 병동 입구에 배식차가 오는 소리에도 구토를 했고, 병원 근처만 가도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자존감의 상실과 외로움이었다. 혈색 좋은 친구들을 보며 “나만 왜…”라며 외로움에 떨었다. 병실 건너 불 밝힌 도서관 건물을 쳐다보며 공부 대신 암과 싸워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서글펐다. 누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었는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의대생이란 자존심을 포기하고 암과 싸우기로 했다. 그것도 즐겁게. 완치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 나으면 다 갚아주겠다고 결심도 했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의 중간중간에 살만한 시간이 10일 정도였다. 그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책을 읽고 침대에서 뒹굴고 친구들과 맛집도 순회하며…. 그러는 사이에 6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쳤다. 그러나 아직 암세포가 남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절망했다. 의학 교과서에 나온 완치 확률은 역시 확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꾹꾹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오히려 한바탕 울고 나니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 담당 교수님은 다시 항암제 치료를 6차례 할 것을 권했다. 학교 복학은 미뤄졌다. 치료기간 동안 뭘 할까 생각했다. 미국 의사자격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픈 게 내 소망이기도 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공부였다. 부모님은 막내 딸인 내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몸이 아플수록 더 공부에 매달렸다. 치료 중간에 일본으로 건너가 1차 의사시험을 치렀다.
12차례의 항암 치료기간 동안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던 건 바로 일을 만들어 바삐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암세포가 남아 다시 6차례의 치료를 더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뜨개질, 십자수를 배워 만든 수예품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뜨개질은 집중력을 요구해 다른 잡념이 안 생겨 좋았고, 수예품을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드디어 어느 겨울날 ‘완치’판정을 받았고 이듬해 봄 나는 의과 대학에 복학했다.
암을 이겨낸 하루하루가 기적의 날들이었고, 감사한 일로 가득했다. 가발을 쓰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게 됐지만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동기들보다 2년 늦게 졸업했어도, 그해 의사국가시험에서 전국 수석의 영광을 안았다. 이어 미국 의사시험도 합격해 의사자격증을 받게 됐다. 그것은 내가 암과 함께 살면서도 꿈을 키우며 살았다는 증거여서 매우 기뻤다.
인턴과정을 거쳐 나는 1999년 3월부터 혈액종양 내과에서 전공의 수련생활을 시작했다. 이젠 정말 행복해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환자 침대에 ‘주치의 박경화’라고 적힌 명패를 볼 때마다 뿌듯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누웠던 그 병상에 의사가 되어 다시 선 것이다.
그러나 전공의 2년차이던 2000년 봄날, 우연히 목에 림프절이 만져졌다. 절대 재발할 것 같지 않던 암이 다시 자라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항암제가 잘 듣는 난소암이라지만 재발한 환자가 완치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첫 한 달간 치료를 잘 넘기고 안정을 되찾았다. 수영을 시작했고, 수묵화 그리기에 도전했다. 항암제로 인한 말초신경 손상 때문에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노력하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새로운 항암제가 내게 잘 맞아서였는지, 암세포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완치’판정을 받은 나는 모교 병원에서 암환자들을 돌보는 종양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암 환자 대부분은 절망과 원망으로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나 그 시간도 자기 인생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고, 남은 인생 중에서 가장 젊고 건강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권한다.
나처럼 난소암에 걸린 그 여대생은 치료가 끝나면 먹고 싶은 게 15가지나 된다고 했다.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은 68세 할머니는 일본 여행부터 가겠다고 했다.
설령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더라도 당장 오늘, 일주일, 한 달 안에 할 일들을 생각해 실천하면 어떨까? 그러면 다시 못 볼 것 같던 첫눈을 몇 번씩이나 보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내게도 건강하게 살아온 시간보다 암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훨씬 소중한 시간이었다.
출처 : 조선일보 201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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