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두들마을 정경 경상도에서는 둔덕을 두들이라 한다. 둔덕에 이룬 마을답게 집들이 비스듬하게 자리 잡았다. 맨 앞에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가 두 줄로 나란한 집이 석계고택이다.
조선 중기, 사회혼란기에 영양은 숨어 살기 좋다하여 명문가들이 모여들었다. 주실마을 한양조씨, 감천마을 낙안오씨, 연당마을 동래정씨까지 저마다 그럴듯한 입향 이야기 하나쯤 달고 몰려든 집안들이다. 석보면 두들마을 재령이씨 집안도 그 가운데 하나다.
병자호란 후,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은 조선에서 살기 좋기로 소문난 영해 인량마을(나랏골)을 떠나 영양에 은거하였다. 충효당을 짓고 나랏골에 뿌리내린 석계의 아버지 이함이 1632년에 세상을 떠나고 1637년에 삼전도에서 인조가 머리를 박고 청에 굴복하자 이함의 삼남 이시명은 숨어 살기로 작정하고 나랏골을 떠난 것이다.
석계(1590-1674)가 맨 처음 들어간 곳은 선친 묘가 있는 영양 수비면 신원리였다. 수비면은 낙동정맥이 관통하는 곳으로 험하고 외지기로는 세상제일이다. 석계는 수비에서 3년 머문 뒤, 1640년 두들마을에 정착하였다.
석계는 나랏골 충효당에서 1남1녀를 둔 채 부인과 사별한 뒤, 스승 장흥효의 딸, 장계향과 재혼하였다. 장흥효는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에 이어 퇴계학을 계승한 인물로 석계를 눈여겨보다 사위로 맞았다. 1616년, 장계향이 19세, 석계 이시명이 27세 때 일이다.
어려운 이웃 위해 성심 다했던 여중군자, 장계향(1598-1680)
▲ 장계향 초상화 조선 유일의 ‘여중군자’, ‘정부인 안동장씨’로 불리나 그녀에게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장계향’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
석계와 장계향 사이에 다시 6남 2녀를 두었다. 장흥효와 이시명으로 이어진 퇴계학 계보는 다시 이시명의 삼남 갈암 이현일, 이현일의 아들 밀암 이재, 이재의 외손자 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졌다. 한 집안이 퇴계학의 계보를 잇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재령이씨 집안이 이함과 이시명에 이어 그 후손들이 대성하여 명문대가의 면모를 갖춘 데는 장계향의 공이 크다. 두 시숙과 동서가 사망하는 흉사가 겹친 집안에 들어와 흉사를 수습하고 일곱 아들 모두 훌륭히 키워 명문대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장계향은 어려서 초서를 잘 써, 당대 최고의 초서 서예가 정윤목을 탄복케 했고 <학발시>, <성인음>, <소소음> 등 시를 짓는 데 재주를 보여 남을 놀라게 했다. 그림, <맹호도>를 남겨 그야말로 시서화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현모양처, 그녀 성품이 여기까지였다면 이씨 집안의 영광일 뿐, 지금 우리가 그녀에 열광할 이유가 없다.
그녀 성품은 집안의 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집안을 넘어 이웃을 생각하는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기근으로 이웃이 고초를 겪자 나랏골에서 그랬듯 많은 재산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모자라면 도토리 죽을 쒀, 가난한 자, 배고픈 자를 구제하는 데 성심을 다했다.
21세기에 장계향을 되살려낸 것은 <음식디미방>이다. 70이 넘은 나이에 우리의 음식문화가 대대손손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끝에 한글로 된 조리서를 펴낸 것이다. 단순한 음식 레시피가 아니라 과학과 인생, 철학이 담겼다. 이 책은 현재 폭발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300여 년 전의 음식문화를 계승하려는 전문가는 물론 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장계향은 매사에 성(誠)을 다한 여성이었다. 성은 그녀의 인생철학인 셈이다.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성을 다한 것은 물론 개인을 넘어 이웃, 공동체로 인생의 폭을 넓힌 여성이었다. 그래서 조선 유일의 여성군자라 불린다. 아들 이현일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정부인 안동장씨'라 불리기도 하나 그녀에게 '장계향'이라는 이름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 당당히 이름을 남긴 것이다.
두들마을 집들과 굴뚝
▲ 아주 작은 굴뚝 석계고택 사랑채 벽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굴뚝 하나, 이번 여행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당긴 굴뚝이다. 간결하고 절제미가 있고 검소하게 보인다.
두들마을 이름이 낯설다. 그러나 낯선 건 우리뿐,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두들은 둔덕의 경상도 말로 두들마을은 둔덕진 곳에 들어선 마을이라는 뜻이다. 말마따나 여러 고택들이 언덕 위에 내려앉았다. 마을 한가운데 석고고택이 중심을 잡고 서쪽구석에 주곡고택, 동쪽으로 석계종택, 석간고택, 유우당이 나란하고 남쪽에 석천서당이 자리 잡았다.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은 석계고택. 석계와 장계향이 이 마을에 들어와 맨 처음 살던 집이다. 부부는 인량마을을 떠나올 때 많은 재산을 놔두고 몸만 오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고택은 아주 작고 검소하게 보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두 줄로 나란한 두이자(二) 집이다. 사랑채 벽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아주 작은 굴뚝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가진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절제하고 등짝 넓은 벽에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조그마한 마당, 뜰이 있다. 두 줄로 뻗은 집채에 마당 양쪽은 흙돌담으로 막혀 마당은 네모꼴이다. 집안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집을 뜰집이라 하는데 제법 뜰집 분위기가 나는 집이다. 혹자는 이를 뜰집의 원조, 조상으로 보는 이도 있다.
석계는 두들로 들어와 은둔하며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석계는 마을 동남쪽 끝에 석천서당을 지었다. 처음에 초가이던 것을 1771년, 석계 아들, 항재 이숭일이 고쳐짓고 1891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 석천서당 석계는 은둔하며 후손들 교육에 전념하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지은 서당이 석천서당이다. 처음에 초당이었으나 후손들이 지금처럼 고쳐지었다.
▲ 석천서당 굴뚝 굴뚝과 아궁이가 함께 나란히 있다. 불김을 가급적 멀리하려는 정사, 서당, 정자에서 볼 수 있는 굴뚝 모양이다.
방은 두 개, 방마다 아궁이와 굴뚝을 두었다. 방고래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나오도록 놓은 되돈고래여서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있다. 영해 괴시마을의 괴정이나 원구마을 난고정에서 보았듯, 불김을 가급적 멀리하는 서당이나 정자, 정사에서 볼 수 있다.
마을 동쪽 끝에 석간고택이 있다. 항재 이숭일의 7세손 이수영의 살림집으로 작가 이문열이 어릴 때 살던 집이다. 강학을 하던 석간정사가 별채로 딸려있고 그 앞에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제법 분위기 나는 고택이다.
▲ 석간고택 석계 4남 항재 이숭일 후손 집으로 작가 이문열이 어릴 적 이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 석간정사와 굴뚝 보기 드물게 고택 안에 강학을 하던 정사가 있다. 앞마당에 있는 200년 된 향나무가 정사의 기품을 높인다. 정사 뒤쪽에 있는 쌍둥이 굴뚝은 정사의 굴뚝답게 아주 낮고 작다.
석간고택 아랫집이 유우당(惟于堂). 1833년, 이상도(1773-1835)가 건립한 살림집으로 당호는 이상도 아들 이기찬(1795-1863)의 호를 딴 것이다. 유우당 글씨는 성주사람, 응와 이원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석보면 주남리에 있던 유우당을 이 마을로 옮겨온 이가 3.1만세운동과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 이돈호(1869-1942)이고 이돈호의 조카인 항일시인 이병각은 이 집에서 태어났다. 문향보다 의기가 충천한 집으로 보인 이유가 있었군!
▲ 유우당 독립운동가 이돈호가 주남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고 항일시인 이병각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죽고고택과 더불어 석계의 형, 우계 이시형 후손집이다.
▲ 유우당 굴뚝 석간고택, 석간정사, 석계고택 굴뚝과 마찬가지로 키는 작으나 다부져 보인다.
이 집은 전형적인 '구(口)'자형 뜰집이다. 석계고택에서 뜰집의 원조를 보았다면 이 집에서 뜰집의 원형을 보게 된다. 유우당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 기단은 볼 만하다. 석간고택, 석간정사, 유우당 굴뚝은 모두 암팡진 키 작은 굴뚝이다. 숨어 살기 좋은 곳으로 정하고 은둔하려했던 석계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굴뚝은 낮게 만든 것일 게다.
마을 굴뚝을 다 둘러보았으나 석계고택 사랑채 벽에 달라붙어있는 굴뚝만한 게 없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그 앞에 섰다. 큰 벽체를 홀로 비추는 호롱불 같은 굴뚝이다. 나라를 구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아니지만 묵묵히 한평생 성(誠)을 다한 여중군자, 장계향 할머니, 아주 작으나 다부진 굴뚝에서 그녀가 보였다.
▲ 석계고택 안마당 사랑채와 안책 동서로 나란하고 양옆이 흙돌담으로 막혀 뜰집 분위기가 나는 집이다.
▲ 유우당 안마당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뜰집의 원형이다. 영해와 영양에서 보았던 대부분 뜰집처럼 대청마루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