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맛 기행

왕피천, 생태관광 명소로 거듭나다

blueroad 2014. 10. 22. 09:03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김명인, '너와집 한 채' 첫째 연, 시집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울진 태생의 시인 김명인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소속인 울진을 이 시에서 '강원남도'라고 했다.

실제로 울진을 돌아다녀 보면 산수도, 사람도 경상도라기보다는 강원도 분위기가 느껴진다.

 실제 1963년 경상북도로 편입되기 전 울진은 강원도에 속했다.

 지금 강원도는 수도권에서 교통이 편해지면서 '강원도다움'을 일부 잃어가고 있지만, 울진은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울진 사람들이 그들의 처지를 비하해서 하는 말들이 있다.

 "등더리가(등이) 가려븐데(가려운데) 오른손도 안 닿고, 왼손도 안 닿는 곳이 바로 울진 아닙니껴.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대구에서 올라 캐도 얼매나 먼데.

" "BYC(봉화, 영양, 청송)도 안 갈라 카는데 (그보다 더 먼) 울진까지 어예 시집가니껴?"

 요즘은 교통이 좋아져서 옛말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5시간, 대구에서 3시간이 걸린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지난 12일 강릉을 거쳐 죽변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 보부상 통행로가 모범 생태관관지로
울진을 대한민국의 대표적 오지라고 한다면, 울진 안에서도 왕피천 유역은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왕피천은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에서 발원해 울진군 서면과 근남면을 거쳐 61㎞를 굽이굽이 흐른 뒤 동해에 합류한다.

 환경부는 2005년 이들 3개면에 걸친 102.84㎢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야생 동식물 포획·채취·훼손 등이 제한되고, 가축 방목과 서식지 훼손 등이 금지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왕피천 주변 4개 마을, 즉 서면 삼근리, 왕피리, 근남면 구산리, 수곡리 등의 주민들이

 왕피천 에코투어사업단을 결성, 탐방로 2개 구간을 조성해 2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바다와 내륙의 물물교환을 두 발로 지탱한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이 우리나라 생태관광의 모범사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왕피천 제1탐방로 초입까지 가려면 서면 면사무소가 있는 삼근리에서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한다.

박달재~동수곡을 거쳐 왕피리 3거리까지 15㎞ 임도는 오지라는 이미지와 달리 시멘트로 잘 포장돼 있다.

대부분 교행이 불가능하고 S자 커브로 이어진 좁은 길이지만, 경사가 가파른 곳이 거의 없어서 오히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피리 3거리에서 탐방로를 동행할 에코투어사업단 안광정 사무국장을 만났다.

 에코투어사업단은 봄부터 가을까지만 탐방예약제에 의한 걷기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숲 해설사와의 투어를 예약한 한정된 인원의 탐방객만 보전지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제1탐방로에는 하루 30명, 왕피천 하류의 제2탐방로에는 80명까지만 받고,

3만원의 숙박비와 1만원의 식비 수입은 주민들에게 분배한다.

 안국장은 "탐방객에게 환경보전의 학습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관광 수익이 반드시 지역주민에게 되돌아가도록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제1탐방로 출발지점인 동수곡 3거리부터 1시간 남짓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굴참나무, 신갈나무, 소나무, 쪽동백, 벚나무, 층층나무, 박달나무, 물박달나무 등이 주로 분포한다.

빨간 단풍보다 노란 단풍이 더 많다. 심은 듯한 자작나무 군락도 나타났다.

 과거에는 단풍나무들이 많았지만, 산림청이 간벌을 하면서 다 베어냈다고 한다.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유기농 농가에서 키우던 축사에 더 이상 소는 없어서 오염원은 없다.

다만 산천어 축제에 전량 납품하는 산천어 치어를 키우는 양어장이 밤에도 불을 밝힌다.

사철 물이 풍부하고, 수온이 낮아서 산천어 양식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 멧돼지 놀이터가 된 임금의 피신처
침엽수림과 침엽·활엽수가 공존하는 혼효림이 잘 발달된 대령산(동), 통고산(서), 금장산(남)으로 구성된 왕피천 유역은

면적이 514㎢에, 국토환경성평가 1등급 지역이 70%에 이른다.

왕피천(王避川)이라는 이름 자체가 왕이 전쟁이나 국난을 당해 피신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왕피천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소국인 실직국의 안일왕이 마지막으로 피신한 곳이다.

 이후로도 이곳은 오지이면서도 물이 풍부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임도가 잘 닦여 있는 것도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서 주석과 구리 광산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안 국장은 "왕피리 일대에 울진 읍내보다 전기가 더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며

 "동수골 분교까지 있었고, 술집과 이발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1시간 반 쯤 걷고 나자 산판길이 끝나고, 다소 가파른 산길이 시작됐다.

전신주 등 사람들이 살던 흔적이 있는 누리마을 터를 지나 굴참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능선과 서쪽으로 보이는 통고산 사이 계공에 동수곡 마을이 나무에 가려 보이다 말다 한다.

고개 마루 쉼터에 멧돼지 흔적이 어지럽다. "생태·경관보전지역 전체가 멧돼지 운동장"이라며

"멧돼지가 밀렵을 피해 모조리 보전지역으로 몰려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더 올라가자 잣나무 조림지 안에 화전민 옛 집터가 보인다

. 옛 전봇대 등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숲 깊은 이곳에는 누군가 가지런히 쌓아 놓은 돌담이 있고,

아궁이, 솥단지, 밥그릇, 숟가락 같은 가재도구도 볼 수 있다.

 곳곳에 과거 화전민들이 거주했던 가옥과 집터 등 화전마을이 있었던 흔적이 나타난다.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화전민 대부분이 몰살당하고 외지로 내쫓겼지만

 산 속에 남은 술병은 아직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안 국장은 "사람이 그리웠던 화전민들은 길손이 지나가면 무조건 붙들고

'밥 먹고 가라'고 권했고, 먹고 나면 '자고 가라'고 강권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 사람도 동물도 먹여 살리는 왕피리 나무들의 살림
드디어 높이 30미터 대 금강송 군락이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탐방로 주변의 굵은 금강송 마다 송진 채취 자국이 선명하다.

 이들 금강송의 경우 일제 강점기보다는 해방 후 송진가공공장으로 보내기 위해 송진을 수탈당했다.

 일제로부터 나쁜 것을 배운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 왕피리 보전지역 일대에서는 산판도로를 이용해 소나무를 벌목하고,

왕피천에 이를 띄워 동해안 마을로 떠내려 보내면 운송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굵고 곧은 소나무는 선박 바닥재로 최적이었다.

실제로 굴구지 마을 용소에 걸린 소나무 토막을 다시 떠내려 보내는 일꾼들이

다른 일꾼보다 훨씬 더 높은 품삯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오지 중의 오지라도 왕피천 유역은 육로와 더불어 물길이 있었기에 수탈과 벌목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굴참나무 노거수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오래 된 나무를 볼 수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불운했던 셈이다.

반면 왕피천 유역과 마주한 불영계곡 북쪽의 서면 소광리에는 큰 소나무를 실어 나를 운송수단이 없었다.

계곡이 너무 얕고 폭이 좁아서 뗏목을 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광리에는 500년 소나무(실제로는 534세 추정)와 미인송(350세)을 비롯한 노거수급 금강송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금강송 군락을 지나자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조림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능선 고도가 낮아지는 곳부터는 인근 양지마을, 햇내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밤나무 군락지가 펼쳐졌다.

올해는 도토리, 잣, 밤이 모두 풍년이라서 탐방로 주변도 온통 떨어진 견과들로 넘쳐났다.

청설모, 다람쥐들도 우선 맛있는 잣과 알밤부터 먹고,

 그게 모자라면 도토리를 먹기 때문에 특히 도토리는 남아돌았다.

한 아주머니가 등산 배낭에 밤을 열심히 주워 담고 있었다.

올 겨울에는 멧돼지들이 민가로 덜 내려올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 숲길 따라 수로 따라 떠나는 '에코 투어'
출발한 지 3시간 반 정도 지나 왕피리 포장도로 및 왕피천 본류와 만났다.

왕피천이 흐르는 방향대로 걸으면 거리고(거리곡,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와 왕피1리 마을회관에 닿는다.

 이곳에서 마을 부녀회원들이 정성스럽게 마련한 '유기농 뷔페'를 점심으로 먹게 되는데,

기자가 방문한 화요일에는 단체탐방을 쉬는 날이라 아쉽게도 먹어보지 못했다.

 2km를 더 걸어 왕피분교를 지나면 농수로로 이어진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은 왕피천 본류를 옆에 끼고 걷는, 보전지역 안에서도 조망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마을을 S자로 휘돌아 나가는 맑고 거센 물길과 강안(江岸) 쪽 누런 벼로 가득 찬 계단식 논이 보인다.

모두 12.1㎞에 이르는 1구간의 종착지인 실둑마을이 나타난다.
제2탐방로는 굴구지마을(구산3리) 주민들이 마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굴구지 산촌펜션에서부터 왕피천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9.8㎞의 여정이다.

역시 화전마을이었던 상천동, 묵은 논과 밭, 용소, 학소대, 거북바위 조망대까지 가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철 따라 은어, 황어, 연어를 볼 수 있고, 물이 맑아 헤엄치는 민물고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년부터 개방할 제3탐방로는 제2탐방로보다 더 하류쪽인 근남면 수곡리에서 시작해서

왕피천을 건너 조선시대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 선친 묘소,

 한티재, 냉수동, 불영계곡까지 이어지는 7.6㎞의 숲길이다.

수백년 간 보부상이 다니던 길이면서 바닷가 마을 젊은 남녀가

사월 초파일에 데이트를 하기 위해 불영사까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 주민들 소통과 참여로 지켜낸 동물 발자국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102.84㎢)은 단일 보전지역으로는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 38개 보전지역 전체 면적의 28.4%에 해당된다.

북한산국립공원보다 약 20% 더 넓고, 동강보전지역의 1.6배에 이른다.

8등급이상 녹지가 전체의 95%가 넘는다. 당연히 야생동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수달, 산양, 구렁이, 삵, 매, 흰꼬리수리, 하늘다람쥐, 담비, 큰고니, 까막딱따구리, 흰목물떼새,

개구리매, 조롱이, 산작약 등 멸종위기종 20종과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실제로 왕피천 유역 산이나 마을에선 산양이나 삵의 발자국과 배설물을 쉽게 볼 수 있다.

2008년 7월 자연환경 정밀조사 결과 1107종의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국장은 최근 탐방예약제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제2탐방로를 운영하는 구산3리의 경우 일부 펜션 주인들이 당초 여름 한 철 피서객들을 상대로

더 비싼 숙박료와 음식 값을 받으며 장사해 왔다.

 이들이 "이제 와서 한 끼 6000원, 숙박비 3만원을 받으라면 남는 게 없어서 장사 못한다"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2코스는 지금 "프로그램 재정비를 위해" 개점휴업중이다.

 2005년 생태·경관보전지역 지정 이전 여름철마다 왕피천 주변에서 벌어졌던

쓰레기 대란과 '떴다방' 식 매점의 바가지 상혼이 부활한 것일까. 안

국장은 요금을 약간 인상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
제1탐방로의 경우 그런 갈등은 없다. 유기농 뷔페 식사를 제공하고, 탐방객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산나물 채취해 각종 나물과 가지볶음 등 10가지 반찬을 제공하고 한 끼 1만원 받는다.

생태관광협회는 이곳에서 가진 에코투어 활성화 협의회에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권유했다.

 여름철에는 기존의 유기농 체험과 약초 교실 등에 이어 왕피천 래프팅을 추가하고,

 가을에는 알밤 줍기와 송이버섯 채취, 봄에는 산나물 채취에 야생화 해설 등을 곁들일 생각을 갖고 있다.
보전지역의 관리를 관청이 아닌 네 개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맡고 있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마을 주민들 가운데서 선발된 92명의 환경감시원들이 총 8개 관리초소에 휴일 없이 교대로 근무한다.

이들은 출입하는 인원과 차량을 일일이 기록·점검하고 탐방객들에게 보전지역내 행위제한 사항들을 알려준다.

또한 밀렵도구, 즉 어로·수렵 장비나 텐트, 취사기구 등을 반입하는지 확인하도록 돼 있다.

주로 40~60대 중·장년층인 이들이 주 5일 8시간 근무해서 환경부로부터 받는 급여는 4대 보험료 제외하고 100만원 남짓이다.

산지라서 농사일이 많지 않은데다 급여가 많지는 않지만,

결코 적은 돈도 아니기 때문에 서로 하려고하는 분위기라고 안 국장은 귀띔했다.

 환경감시원들은 평생을 왕피천 유역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온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자연을 지키고 있다.
이웃의 서면 소광리와 북면 두천리는 금강송 숲길을 탐방예약제로 운영해 생태관광 성공사례를 일궈냈다.

왕피천 유역 마을 주민들도 자연을 지킴으로써 사람도 더 살맛나는 곳으로 가꿔가고 있다.
울진=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경북 울진군 왕피천 생태·경관 보전지역 금강소나무 숲

 / 격암 남사고 유적지(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소재)에 심겨진 금강소나무 위로 흐르는 별 궤적

/ 민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누리마을 터 /

주민들이 조성한 밤나무 군락지의 밤송이 /

 단풍에 물든 통고산 / 왕피천 탐방로 주변의 금강송 군락

 / 탐방로에서 바라본 왕피천(왼쪽)과 왕피리 포장도로 곁을 흐르는 왕피천(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