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맛 기행

마을은 화랑, 자연은 그림.. '新몽유도원'

blueroad 2016. 6. 8. 20:14

 

 

경북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의 경로당 뒤편 빈집을 새장 속에 가뒀다. 미술프로젝트 ‘신 몽유도원도’의 작품 중 하나인 ‘새장 속의 새’. 손몽주 작가의 작품이다. 새장 속에 가둔 빈집의 공간으로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 마을의 허전함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날아갔던 새들이 다시 돌아올 거처로 남겨둔다는 뜻이었을까.

경북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의 경로당 뒤편 빈집을 새장 속에 가뒀다.

미술프로젝트 ‘신 몽유도원도’의 작품 중 하나인 ‘새장 속의 새’. 손몽주 작가의 작품이다.

 새장 속에 가둔 빈집의 공간으로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 마을의 허전함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날아갔던 새들이 다시 돌아올 거처로 남겨둔다는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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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면 횡계천변의 짙은 숲에서 스스로 한 폭의 그림으로 서 있는 정자 모고헌이다.

화북면 횡계천변의 짙은 숲에서 스스로 한 폭의 그림으로 서 있는 정자 모고헌이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로 드는 초록 그늘의 솔숲길. 노부부가 다리쉼을 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청량한 솔숲길을 걸어갔는데, 그 걸음이 마치 부부가 함께 살아온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로 드는 초록 그늘의 솔숲길.

노부부가 다리쉼을 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청량한 솔숲길을 걸어갔는데,

그 걸음이 마치 부부가 함께 살아온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상마을의 담벼락에 매화가 환하게 피어났다. 꽃잎을 도자기처럼 구워서 담에 일일이 붙였다. 담 오른쪽에는 꽃그늘 아래 앉은 집 주인 할머니 모습을 그려 넣었다.

가상마을의 담벼락에 매화가 환하게 피어났다. 꽃잎을 도자기처럼 구워서 담에 일일이 붙였다.
담 오른쪽에는 꽃그늘 아래 앉은 집 주인 할머니 모습을 그려 넣었다.

 

경북 영천 미술마을

경북 영천시의 화산면에 그 마을이 있습니다.
가상리. ‘아름다울 가(佳)’에 ‘위 상(上)’자로 이름을 삼았으니 ‘아름다운 윗마을’이란 뜻입니다.
부드럽고 점잖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마을은 순하디 순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 마을에 ‘새장이 된 빈집’이 있습니다.
노란색의 비닐하우스 골조를 마치 새장처럼 덮어놓은 빈집입니다.
빈집 마당에는 달맞이꽃이 지천인데,
시간을 가둔 새장 안에 새는 없고, 집주인의 정성이 반질반질 묻어난 툇마루가 들어갔습니다.
새장 앞의 마을 경로당 벽에는 거기서 소일하는 어르신들의 손바닥이 별자리처럼 찍혀 있습니다.
골목이 만나는 자리의 옛 마을회관은 마을박물관이 됐고,
회관 마당에 얼기설기 엮은 처마에는 영천 사람들의 제사상에 꼭 오른다는 돔배기(상어) 조형물이 매달려 있습니다.
간판 없는 동네 슈퍼와 일이 없어 기울어져 가는 방앗간, 정자가 된 고목 한그루….
아 참, 부드러운 능선의 백학산을 뒤로 두고 앞으로는 작은 냇물이 흘러가는
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시안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겠네요.

가상리는 미술마을입니다.
5년 전쯤 마을 미술 행복 프로젝트 사업 공모에 ‘신 몽유도원도’라는 이름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그때 마을로 들어온 제법 이름난 화가며 조각가들이 주민들과 몇 달쯤 어울려 살면서 마을을 미술로 단장했습니다.
빈집을 새장으로, 마을회관을 박물관으로 바꿔놓고,
방앗간 담에다 도자기 꽃을 매달아 놓은 것도 이 예술가들입니다.
마을을 단장한 미술은 생뚱맞은 화려한 색감의 벽화를 쓱쓱 그려서 덧칠해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과 어울리는 자리마다 정성으로 그리고 빚어낸 것들이어서
‘아름다운 윗마을’의 이름값을 넉넉하게 보태고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것만 좇느라 몰라봐서 그렇지 영천은 곳곳이 유순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팔공산 아래 절집 은해사로 드는 운치 있는 소나무 숲길이 그렇고,
도로가 뚝 잘라내는 바람에 볼품없어지긴 했으되
몇 그루 왕버드나무만으로도 자못 당당한 자천리의 오리장림(五里長林)도 그렇고,
그 숲길을 지나 마을 길 아래 푹 꺼진 하천을 끼고 있는 오래된 한옥
옥간정과 모고헌의 그윽한 툇마루의 정취도 그렇습니다.
묘봉암 뒷산에서 내려다보는 은해사의 암자 중암암 경관도 한 폭의 그림이고,
거조암의 흙으로 빚은 소박한 나한상 역시 훌륭한 조각품입니다.
길 위에서, 또 마을에서 만나는 바람이 지나는 숲, 독경 소리 그윽한 절,
반질반질한 툇마루의 낡은 집과 그 집에 깃들여 사는 이들….
이런 일상의 모든 것이 우아한 예술품이 되는 곳, 거기가 바로 영천입니다.

 

이태백 詩 새긴 벽·새장이 된 빈집 … 다섯 길 따라 ‘작품’ 감상

 

# 시골 마을에 예술의 꿈을 그리다

몽유도원도. 조선 초기 시대 최고의 명화로 꼽히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꾼 꿈을 그린 그림이다.
정묘년, 그러니까 1447년 음력 5월 20일. 안평대군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꿈을 꾸었다.
항상 마음에 그리던 무릉도원을 박팽년과 함께 거닐던 꿈이었다.
그 꿈을 잊을 수 없던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했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경북 영천의 가상리 일대에는 ‘신(新) 몽유도원도’가 있다.
화산면 가상리를 중심으로 화산 1, 2리, 그리고 귀호리까지 엮은
미술마을 프로젝트의 이름이 신 몽유도원도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쉰 명 남짓한 예술가들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마을 곳곳에서 미술 작업을 벌였다.

수십 년간 비워둔 빈집이 그 자체로 인상적인 오브제가 됐고,
방앗간은 세월의 나이테를 그린 나무로 장식됐으며,
마을 주민들의 과거 추억이 소박한 박물관에 담겼다.
경로당 벽에는 마을 주민들의 손도장이 별자리처럼 찍혔고,
부끄럼 많은 할머니는 제집 담벼락 꽃그늘 아래 앉아 있는 그림으로 그려졌다.
도로변의 낡은 창고 벽에는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으로 끝나는
이태백의 시 ‘산중문답’의 글귀가 새겨졌으며
긴 담에는 마늘밭 이랑이 펼쳐진 마을의 전경이 담겼다.
지난 2004년 폐교 자리에 들어선 가상리의 시안미술관을 가운데 두고
4개의 마을이 하나의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셈이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면,
가상리 마을에서 그들이 그려낸 것은 유순한 한 시골 마을에 풀어놓은 꿈의 풍경이었다.
과연 예술가들이 서른 가구 남짓한 시골 마을에서 꾸었던 꿈은 어떤 것일까.
빈집을 새집의 형상으로 은유한 작품 ‘새장 속의 새’는 떠나버린 이들이 다시 깃들일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을까.
너나없이 어려웠으되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온 따스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 新몽유도원도 둘러보는 다섯 개의 길

영천의 신 몽유도원도를 둘러보는 여정의 출발지점은
폐교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를 두르고 있는 시안미술관이다.
한때 학생 수 400명을 헤아렸다던 가상리의 화동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1999년 폐교된 뒤
2004년 그 자리에 들어선 시안미술관은 미술마을의 중심이다.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미술관은 근사하다.
미술관의 잘 단장된 건물도, 아리랑을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전시도 그렇지만,
너른 잔디밭과 그 주위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그늘만으로도 마음을 끄는 곳이다.

신 몽유도원도는 모두 다섯 개의 길로 이어진다. 먼저 가상리 마을을 둘러보는 길이 ‘걷는 길’이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은 ‘바람길’,
수달이 산다는 천변의 다리를 건너가는 길이 ‘스무골길’이고,
화남면 귀호리의 품격 있는 정자 귀애정으로 드는 길이 ‘귀호마을길’이며,
복숭아밭이 펼쳐진 모산 골짜기로 드는 길이 ‘도화원길’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모르겠으되, 지금은 이런 길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시안미술관에서 지도를 하나 받아들고 마을 골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보물찾기를 하듯 미술품을 찾아 나서는 게 더 즐겁다.
가상리의 폐가 벽을 헐어 뼈대만 남기고 정원으로 바꾼
‘빈집 갤러리 마루’와 빈집을 통째로 철망에 가둬놓은 무인 카페
‘바람의 카페’는 헐리고 없으니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너나없이 시골을 떠나는 형편에 미술품이던 폐가와 빈집이 헐리고 마을로 들어온 이의 집이 되었으니,
그게 그리 아쉽지만은 않은 일이지 싶다.

미술마을에서 꼭 들러야 할 곳 중의 하나가 귀호리의 귀애정이다.
풍수지리에 능한 영조 때 선비 조명직이 자리를 잡은
귀애 고택에 딸린 정자인데 연못을 앞에 둔 정자의 품격이 넘친다.
정자는 당상관 벼슬을 한 증손자 조극승을 기리기 위해 100년 전쯤 후손이 세운 것으로
정자 앞에 연못을 놓고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 뒤
거기에 다시 육각형 정자를 세우고 나무다리로 연결해 운치를 더했다.
정자의 누마루에는 ‘수월루(水月樓)’란 현판을 달아두었다.
아마도 누마루에 걸터앉아서 연못에 비친 달을 보는 맛이 그만이었던 모양이었다.

 

# 오리장림에서 느끼는 생명

구태여 예술가의 노고를 빌리지 않더라도 영천 땅에는
예술작품에 견줘도 모자라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그윽한 경관이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횡계구곡이다. 영천의 화북면 횡계리에는 작은 개천인 횡계천이 있다.
횡계천은 마을 길 옆으로 푹 꺼진 작은 협곡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길.
이 자그마한 개천에 옛사람들이 이름 붙여 소요하던 ‘구곡(九谷)’이 있다.
외지인에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거기 사는 이들도 아는 이들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이다.

영천 시내에서 횡계구곡으로 가는 길은
화남면 소재지를 거쳐 화북면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에 올라서야 하는데,
그 길에서 먼저 ‘오리장림(五里長林)’을 만난다.
지금이야 바람을 막거나 제방을 보호하고 홍수를 방지하는 일을 단단한 시멘트가 도맡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드러운 숲이 그 일을 했다.
이름 그대로 ‘5리(2㎞)’를 이어지던 ‘긴 숲(長林)’은 400년 전 조성돼 그 일을 맡았던 숲이다.
어찌 그런 일뿐일까. 한여름의 숲은 초록의 서늘한 그늘을 드리웠고,
시원한 바람이 지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그 숲은 지금 왜소하기 짝이 없다.
한때 왕버들, 굴참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말채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자천리에서 오동리까지 이어졌다는데 사라호 태풍으로 절반 이상이 유실되고,
남은 숲도 국도 확장공사로 두 동강이가 나버려 5리는커녕 2리도 채 안 될 지경이다.
하지만 모진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거목의 위세는 당당하다.

거대한 둥치를 비틀며 서 있는 왕버들과 팽나무의 위세도 압도적이었지만,
이 숲에서 눈길을 붙잡은 건 막 숨을 거두려는 나무들이 보여주는 생명력이었다.
둥치가 속까지 다 썩어버린 뒤에 남은 껍질 부분을 땅에 박고 위태롭게 서서 푸른 잎을 틔운 거목도 있고,
넘어져 죽은 둥치에서 여린 곁가지 하나만 살아남아 가녀린 생명을 이어가는 것도 있었다.
단단한 시간을 이기고 끝내 살아남은 건,
거친 질감의 화폭 같은 숲에서 싱싱하게 머리를 들고 있는 건, 모두 부드러운 것들이었다.

숲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천 팔공산 자락의 절집 은해사로 드는 천변의 소나무 숲길의 그윽함도 빼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고즈넉한 솔숲이 그늘을 드리운 길을 노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느릿느릿 걸어갔는데,
그 광경이 마치 부부가 함께 살아온 인생을 은유하는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묘봉암의 뒷산에서 건너편으로 바라보는 중암암의 경관에서도 진경산수화가 떠올랐고,
거조암에서 만난 서로 다른 표정과 인상의 526기의 조형미 넘치는 나한상에서는 세련된 미감(美感)이 느껴졌다.

# 정자에서 구곡의 경관을 내려다보다

35번 국도가 오리장림을 지나면 이내 횡계구곡이다.
보현산 아래 근래 새로 지은 댐에서 흘러드는 자그마한 개천인 횡계천은
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규모도 경관도 없다.
그러나 계곡 아래로 내려서 보면 제법 기암과 고목으로 곳곳에 명소를 만들어낸다.
구곡이라 이름 붙여진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횡계구곡의 천변 숲에는 그윽한 정자 모고헌과 옥간정이 차례로 서 있다.
차례로 9곡 중의 3곡과 4곡을 차지하는 곳이다.
모고헌과 옥간정은 조선 숙종 때 전망양·규양 형제가 주자의 도학적인 삶을 꿈꾸며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주자가 그랬듯이 두 형제도 물이 낮고 큰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자세와 삶의 도리를 가르쳤으리라.
낡은 정자는 다소 쇠락했지만,
말끔히 칠해지고 단장된 관광지에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맑은 기운이 담겨있었다.

모고헌은 시늉으로 자물쇠를 매달아 놓았지만, 누구든 밀면 열리도록 해두었고,
옥간정은 마침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후손이 낡은 창호를 뜯어내고 새로 한지를 정성껏 바르고 있었다.
후손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이 깊은 곳까지 찾아든 외지인이 반가웠던 탓일까, 기꺼이 정자 마루를 내주었다.

정자에 앉아 저 아래 자그마한 협곡을 휘돌아가는 횡계천의 서늘한 물소리를 듣는다.
정자에서 바라뵈는 숲 아래의 천변 정취가 어찌나 근사하던지,
여름 소나기 그친 뒤에 여기 정자의 서늘한 마루에 앉아 바둑이라도 한 수 둔다면
그게 바로 수묵화 속의 ‘선계(仙界)’로 건너가는 일에 다름없다 싶었다.

이렇듯 영천에서 만나게 되는 건 격식 있고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것의 미감이다.
작고 소박한 건 느슨하게 열려 있고, 그 느슨함은 여백의 편안함으로 읽힌다.
그 여백을 읽으려면 되도록 속도를 늦춰야 한다.

영천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되도록 걸음을 늦춰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