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맛 기행

도산서원을 두른 담장, 퇴계 선생도 좋아할까?

blueroad 2015. 11. 6. 16:05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보물 제211호) 삼문에서.
ⓒ 김연옥

어디라도 훌쩍 떠나지 않으면 억울한 생각이 드는 계절이 가을인 것 같다.
더군다나 우리 역사의 흔적에 울긋불긋 가을을 덧칠한 곳이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천원권 지폐에 실려 있는 친근한 얼굴만큼이나 더 알고 싶은 퇴계 선생,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목조 건물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절집 봉정사를 깊어 가는 가을날, 만나고 싶어졌다.

지난달 27일 오전 8시 20분께 창원에 사는 지인들과 함께 안동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을 향해 길을 나섰다.
출발하기 직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거세게 쏟아져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안동으로 들어서면서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어느새 멎었다.

 

가을이 내려앉은 도산서원서 퇴계를 만나다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안동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 김연옥

불타오르는 듯한 단풍에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내 가슴은 이미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비바람에 단풍잎들이 떨어져 빨갛게 길을 물들이고 있는 처연한 광경마저도 아름다웠다.
안동호 쪽 비탈에 심은 나무들이 갑갑할 정도로 시야를 가리더니 천광운영대 쪽으로 다가가니
안동호 건너편에 둔덕처럼 솟아 있는 시사단(경북유형문화재 제33호)이 눈길을 끌었다.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려 조선 정조 16년(1792)에 지방 인재들을 선발하는 도산별과를 거행했던 일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번암 채제공이 지은 글로 비를 세웠던 곳이다. 
당시 응시자가 무려 7천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71년에 착공한 안동댐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되자 원위치서 10m 높이로 둥근 축대를 쌓아 그 위로 옮기게 되었다.

  시사단(경북유형문화재 제33호)
ⓒ 김연옥
  퇴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 김연옥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도산서원의 고운 자태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퇴계는 명종 16년(1561)에 유생들이 기거할 농운정사와 함께 도산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쌓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인 선조 7년(1574)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문인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세운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먼저 퇴계가 살아생전에 지은 도산서당으로 갔다.
서당 앞마당 한구석에는 그가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 붙였다는 조그만 연못이 있다.
진흙 속에 자라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함과 향기로움을 지니는 연꽃을 여기에 심었다 하니
그의 꼿꼿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스레 답답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당에 두른 담장 탓인 것 같다.
자연 전체를 정원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을 뿐더러 퇴계의 정신을 가두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도산서원을 두루 둘러보면서 담장을 쳐다보면 자연과 어우러진 우리 건축의 미를 한껏 즐길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광명실은 동서 두 채로 되어 있다. 사진 속 건물은 서광명실이고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 김연옥
  전교당(보물 제210호). 명필 한석봉 글씨로 선조가 서원에 내린 '도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 김연옥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광명실은 동서 두 채이고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광명실 현판이 퇴계의 친필이라 한참 쳐다보게 된다.
우리는 진도문을 거쳐 전교당(보물 제210호)으로 들어섰다.
전교당은 유생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이었다.
명필 한석봉 글씨로 선조가 사액한 현판이 볼 만하다.

도산서원은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대원군 서원 철폐 당시에도 철폐를 면했다.
전교당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는데 동재는 박약재, 서재는 홍의재라 불렀다.
사원 제일 뒤쪽에 위치한 상덕사(보물 제211호) 삼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덕사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문 가까이 핏빛 가을을 토하고 있는 산비탈을 바라다보니 내 마음밭에도 가을이 성큼 들어앉았다.

조선 성리학을 대성한 퇴계에게 따라다니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주리론(主理論),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어려운 개념들이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지만 한국의 정신이라 말할 수 있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품은 절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극락전 앞에는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이 있고, 선방이었던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동향으로 서 있다.
ⓒ 김연옥

우리는 도산서원을 뒤로 하고 천등산 봉정사(경북 안동시 서후면)를 향해 달렸다.
신라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세웠다는 봉정사에 이른 시간이 오후 2시 20분께.
자연스레 놓인 돌계단을 딛고 만세루(경북유형문화재 제325호)를 향해 올라가는 길이 정겹고 예뻤다.
 더욱이 만세루 누마루 아래로 난 돌계단을 오르며 차츰 몸집이 드러나는 대웅전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고려 말·조선 초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는 다포식 건물로
여느 법당과는 달리 건물 앞쪽에 난간을 둘러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참으로 특이했다.
스님들이 경전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강당이었던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의 지붕이
대웅전 지붕 아래에 맞물려 들어가 처마가 겹쳐 있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만세루(경북유형문화재 제325호) 누마루 아래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전과 화엄강당이 위치한 마당에 이른다.
ⓒ 김연옥
  건물 앞쪽에 난간을 둘러 툇마루를 설치한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그리고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 김연옥

봉정사의 백미는 단연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국보 제15호)이다.
한동안 부석사 무량수전을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여겼던 적도 있었지만
1972년 극락전 보수공사를 위해 해체했을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립 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봉정사 극락전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화려한 매력을 지닌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로 배흘림기둥에
공포가 기둥머리 바로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중앙에 판문을 달고, 양쪽에는 서책이나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을 연상하게 하는 살창을 달아 독특하다.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인 옆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되는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이 위치하고 있고
선방이었던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동향으로 서 있다.
봉정사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과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란 두 개의 공간 배치가 적절히 어우러져 기억에 오래 남는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 영산암에서.
ⓒ 김연옥

봉정사 답사에서 빠뜨리지 말고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영산암이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화루 누마루 밑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안마당에 이르게 된다.

낡아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공간 처리가 돋보이면서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다.
우화루와 옆 건물을 좁은 마루로 연결해 오갈 수 있게 만든 재미있는 구조와
세심하게 건물 바깥으로 낸 물길 등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우리는 봉정사 부근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하고서 서둘러 창원을 향해 달렸다.
가을이 물든 길 위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고, 나는 너무도 예쁜 절집 봉정사를 벌써 그리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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