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대궐 선암사
선암사를 찾는 길은 주차장부터 포근하다. 어느 절집처럼 딱딱하게 포장 된 도로가 아닌 실팍하고 보드라운 마사토 길이어서 걷는 맛부터가 다르다.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숲길은 새소리 물소리가 함께 한다. 하늘을 가린 숲길을 따라 몇 굽이 돌면 호법장승이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서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작은 홍교가 보이는 굽이를 돌면 강선루가 숨은 듯 보인다. 홍교 아래 물에 비친 강선루는 가히 선경이다. 이 곳에서 물에 빠진 강선루를 바라보노라면 승선교와 강선루를 절묘하게 배치했던 옛 선인의 심미안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졸작 92년 제 1회 개인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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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당을 지나 야생 차밭을 옆으로 하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고색이 창연한 태고총림 선암사다. 언젠가 와 본 것도 같은 친근감이 든다. 인위를 배제한 채 다듬지 않는 절이다. 오랜 세월을 이기고 처음처럼 놓여, 그래서 제대로 된 절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조계산 너머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면서 세월을 잊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숱한 중생을 깨우쳐 왔던 절이다.
선암사는 송광사와 함께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 한다. 송광사가 정해결사의 수도장이었던 승보사찰이었다면 선암사는 스님들이 결혼을 할 수 있다는 태고종 본산인 절이다. 송광사가 절터를 평면으로 넓게 다듬어 엄격한 비율에 의해 공간배치를 했다면 선암사는 자연에 기대어 알맞게 터를 다듬어 배치한 점이 다르다. 그래서 송광사에 들르면 압도되지만 선암사는 그냥 포근하기만 하다. |
선암사는 어느 절집에 비해 나무들이 많다. 절집을 에워싼 숲이 좋아 계절 마다 둘러보는 느낌 또한 다르다. 넓지 않는 공간이어서 돌담장을 둘러친 고샅길 따라 양편으로 작은 절집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 기웃거리면 돌아보는 재미가 좋다. 그냥 둘러보거나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많아 시간을 세우고 유유자적 구석구석 돌아야 제 맛이 나는 절이다.
지금 선암사는 지금 꽃대궐이다. 일주문 담벼락에 기댄 연상홍과 자산홍에서 시작하여 연산홍과 철쭉, 겹왕벚꽃이 온 절간을 뒤덮고 있다. 이른 봄 빨간 동백꽃과 홍매화가 추위를 밀어내면 하얀 매화와 노란 산수유가 뒤를 이어 수를 놓는다. 이어 벚꽃이 요란을 떨고 백목련 흰 자태가 고고하게 피고 나면 철쭉과 복성꽃과 연분홍 겹왕벚꽃이 온 절집을 치장하기 시작한다. 늦은 봄 왕벚꽃 그늘에 누우면 바람에 흩날리는 무수한 꽃보라에 취할 수 있다,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홍매화를 비롯하여 모두가 연륜을 이긴 굽고 휘어진 등걸에서 피어난 꽃들이어서 더 고고하고 곱고 화려하다. 다양한 꽃나무들이 구석구석 적절하게 자리 잡아 어느 곳을 가나 절집들은 꽃에 묻혀 있다. 그 것뿐이 아니다 여름이 되면 온 절은 하얀 불두화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린다. 꽃이 있어 선암사는 가장 아름다운 절이 된다.
꽃구경을 마쳤다면 뒷깐(해우소)도 빠트려서는 안 되고 호암선사가 관음보살의 도움을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었다는 아름다운 원통전도 둘러보아야 한다. 산을 좋아한 사람이라면 기어이 등산 채비를 하고 굴목재를 넘어 보리밥집에 들려 산채나물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봄볕에 등을 말려 볼일이다. 더 시간이 나면 휘적휘적 송광굴목재를 넘어 송광사에도 들려 본다면 일석이조가 아닌 일석삼조가 될 터이다.
선암사는 잘 익은 세월과 푸릇푸릇한 색채의 향연과 고운 꽃들의 은은한 꽃향기에 취할 수 있는 고향 같은 절집이다.
2008.4.25 (필경 김낙연)
☞ 우리가곡사랑회에서 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