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

[스크랩]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알려지지않은 연예계 스토리

blueroad 2018. 5. 20. 17:49

 

 

 

 

-알려지지않은 연예계 스토리-

 

-잔소리의 여왕’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인정이 많았다. 경찰의 검문검색이 많았던 그 시절 행여 쇼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서에 끌려가면 부리나케 달려가 사정을 호소해 풀어주게 한 일도 있었다. 쇼 무대의 사회자였던 이대성이 나중에 텔레비전의 톱 코미디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자의 도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69년 장안의 화제였던 TBC 코미디 ‘웃음의 파노라마’의 연출자였던 고 김경태씨에게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며 이대성의 출연을 알선해준 사람이 즉시 이미자였다.
그는 연예인위문단 시절인 1962년, 그러니까 최숙자가 한창 인기 정상을 구가할 때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했던 것이다. 데뷔 무렵 그에 대한 팬들의 열화 같은 호응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공연에서 톱스타 최숙자가 앙코르로 한 곡을 부를 때 유망주에 불과하던 이미자는 2곡을 불렀다.
그렇지만 이미자는 ‘국가대표 여가수’로 부상한 이후에도 거의 지방공연을 다니지 않고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정이 많은 대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성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미자정도로 잔소리 많은 사람도 없었다고 당시 쇼 무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시절 이미자의 별명은 그래서 ‘쨍쨍이’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대놓고 말하기 무서워했지만, 최희준만은 가끔 ‘쨍쨍이’라고 부르며 이미자를 약올렸다. 그가 한참 공연을 다니던 1968년 연예인에게 필요한 경우의 물품을 팔던 30대 아주머니가 있었다. 외상값을 받으리 준 다음 졸졸 따라다녀서 그 아주머니의 별명도 ‘쨍쨍이’였다. 최희준은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미자 들으라고 “쨍쨍이 아줌마 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때마다 이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하였다.
1970년 서울 동대문극장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원맨쇼의 개척자’ 남보원은 본의 아니라도 실수로 이미자의 원성을 산 적이 있다. “이미자!”라고 소개해야 될 수 있는데 그만 “조미자!”라고 해버린 것이다(당시 실제로 조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여가수가 있었다). 여기에 심사가 뒤틀린 이미자는 노래를 마치고 나서 무대 뒤로 돌아와 “아니, 저 놈 실성한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을 바꿔?” 하며 듣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핀잔을 퍼부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어쩌면 노래에 대해서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트곡이 많은 편이다 보니 이미자는 공연중에 객석으로부터 보통 20곡이 넘는 리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회자나 악단은 손님들이 많이 요청한 곡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이미자는 다른 곡을 부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를 보면 악단이 판단한 곡보다 이미자가 선택한 곡이 항상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느 곡이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가를 예측할 줄 아는 ‘무대의 천재’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의 천부적인 센스에 대하여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고봉산씨의 평. “이미자는 그날로 곡을 받아서 단숨에 가사를 외우고 취입에 임할 수 있는 가수다. 국내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는 이미자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사’ 위키리, ‘악동’ 김상국-
1974년 강원도 황지 공연 때 그는 탄광지역에 유난히 즐비했던 요정으로부터 거의 매일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들이 김샐 가 되게 그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신사다운 매너를 지켰다.
덩달아 따라간 사람들은 호스티스들과 질탕 놀이를 즐기는데도 막상 주빈(主賓)인 그는 한치도 짓궂어야 되거나 추잡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술자리가 일찍 끝나버리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던 것이다. 신사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서 ‘쇼 무대의 명물’로 통했던 가수 김상국은 위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대로 ‘악동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도를 넘어선 짓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골탕먹였지만, 때로는 ‘기행’으로 배꼽을 잡게 하였다. 쇼 무대 사회자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김상국이야말로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람을 즐겁게 한 진정한 의미의 엔터테이너였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단원들 앞에서 놀다가 신이 나면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신체까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여자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물건’만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들이 대경실색하여 “어머나! 이게 뭐야?” 하며 괴성을 내질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에서 나타난 그의 악동기질은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히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실례를 하였다.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이던 배영달씨는 격노해 그를 다그쳤으나 김상국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 거요” 하며 아예 잘못이 없는 것이다는 식으로 응수했던 것이다. 결국 김상국이 사과를 해서 말다툼은 끝났지만, 예의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김상국은 또 무대 뒤에서 소변을 봤고, 배영달씨도 마침내 두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숙명의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
남진과 나훈아는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초반 숙명의 라이벌로서 가요계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인물들이다.

아마도 국내 대중음악 사상 본인들이나 팬들이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하고 갈등했던 가수로는 이 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송에서 행여 둘이 함께 소개되면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도 시큰둥한 채 서로 인사를 나눴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당시 야당 정치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DJ와 YS처럼 목포와 부산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남진과 나훈아의 격전에는 ‘지역성’마저 개입, 한층 팬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고지를 선점한 남진은 가히 1980년대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곳은 전지역 주민들이

술렁거렸고, 공연이 끝나면 극장 앞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연히 남진은 인파를 피해 별도의 여관에 투숙해야 했고 그 덕에 공연단 숙소에서는 엉뚱한 사람들이 ‘포식’을 했던 것이다.

여성 팬들이 남진이 머무는 줄 알고 정성 들여 만들어온 음식을 쉴새없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남진 한 것이라면 윤복희와의 열애와 결혼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 사랑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와 전화통화에 열을 올렸다.

통화가 얼마나 길었냐 한 상태라면 그날 공연에서 번 돈을 전화 통화료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다.
이 공연의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회고담. 하루는 미국에 있던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전남 완도에 잠입했다.

무대에서는 한창 코미디 ‘최진사댁 셋째 딸’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상대역 셋째 딸은 홍화숙이란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로 들어가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아 입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 연기를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갑자기 쇼는 3분이나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 있다는 김태랑씨와 분장실 요원들은 낄낄 웃어댔지만, 관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쥐죽은듯 조용했고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신성한 공연까지 그르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나중에 갈라설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서로 사랑해 버리기 때문에 헤어지는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훈아의 케이스는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로맨스가 걸작이다. 두 사람도 역시 공연 중에 그 관계의 실체를 드러냈다. 1974년 박종구씨가 단장이었던 ‘라이온스’ 쇼단 주최로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이 열렸을 때였다. 이 무대 사회자였던 최성일씨가 나중에 밝힌 이야기. 1회 공연을 마친뒤에 분장실에 돌아와 있는데 갑자기 사과와 배 한 궤짝이 들어왔고 박단장은 나훈아가 사는 것이라며 많이들 먹으라고 하였다.

 단원들이 나훈아에게 감사표시를 하고 한참 먹고 있다는 도중 난데없이 김지미씨가 나타났다.
김지미씨가 “수고들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나훈아는 “뭘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은 바쁘고 위세 높은 대스타가 남의 쇼에 와서 먹을 것까지 사온 것에 의아해했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눈빛이

여느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도 얼마 뒤 매스컴에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열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마침내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를 목격한 최성일씨의 한마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고, 연기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어요!”
전성기 시절 남진은 특유의 장난기로, 나훈아는 ‘소도둑’이란 별명과는 다르게 스스럼없는 인정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남진은 공연이

끝나면 자가용도 보내버린 후에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이유는 사람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19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 공연을 마친 다음에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 방이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남진 특유의 악동기질이 발동하였다. 대뜸 ‘물이야!’를 ‘불이야!’로 바꿔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왔다.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던 단원들은

한바탕 대소동을 벌였다. 구석에서 남진은 신난다며 낄낄거렸다. 그는 “공동체랄까, 너도 나도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며 상대적으로 낭만이 메마른 지금의 가요 풍토를 꼬집어 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괴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나훈아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1983년 그가 서울 천호동 은성카바레를 경영했을 때 과거에는 동시에 자리하기조차 꺼렸던

남진을 출연가수로 섭외, 동시에 무대에서 정답게 노래하였다. ‘당사자 해결’ 차원에서 관계개선의 기회를 나훈아가 마련하고

남진이 선뜻 응한 것은 ‘휴머니즘’을 체험한 그 시절 스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장면인 듯하다.

-건달을 누인 박상규의 주먹-
첫 리사이틀을 갖는 박상규는 무척 신경이 곤두섰고 마침내 극장 앞에서 사회자 김태랑씨와 식사를 하던 도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찡그린 얼굴로 한마디 말이 없던 박상규가 수저를 들 찰나 극장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거구의 건달 하나가 불쑥 식당에 나타났다.
“상규! 밥 묵네. 보소, 나도 밥 한 그릇 사주소! 누군 입인 후에 누군 주둥인기요?”
김태랑씨가 말을 받으려 하자 박상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되레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불량배는 더 기세가 등등해져 “와, 아니꼽나?

밥 한 그릇 못 사줄 형편이믄 내가 사주까? 정말 보니까 진짜 ‘조약돌’만하네!” 하고 시비를 걸었다.
작은 체구와 히트곡이 같이 능멸을 당하자 그때까지 침묵하던 박상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른손 주먹에 전 체중을 실어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방 맞은 건달은 마치 고목이 쓰러지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버렸다.
코앞에서 현장을 본 김태랑씨는 “그것은 쿵푸영화의 이소룡보다 훨씬 비호 같은 동작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상규는 뒤에 “그 친구가 워낙 약체였으니까 한방에 간 거지 뭐”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김태랑씨의 느낌은 달랐다.

“작은 고추는 맵고, 짠물 먹고 자란 인천 주먹은 역시 강하다!”(박상규는 인천 출신이다)
박상규는 괴팍스러운 애주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밤 공연이 끝나면 공연단 일행은 숙소로 들어가서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곤 했는데 순회공연 60일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라면 한 그릇에 소주가 곁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라면이 익으면(더러는 덜 익혀서) 당장 먹는 게 이치였지만 그는 이상하도록도 라면이 퉁퉁 불 때까지는 절대 소주병을 따지 않았다.
보기 흉할 만큼 라면이 불어야 그것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켰다. 김태랑씨는 “라면이 불 때까지 옆에서 말동무 노릇을 해주는 것이라도

힘들었지만 그 라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술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상규의 별난 라면 식(食)습관이 널리 퍼져 따라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상규가 남자다웠다면 1970년대의 인기가수 이수미는 여자다웠던 가수로 기억된 것이다. 그런 이미지에는 빅 히트곡 ‘여고시대’

또는 ‘내 곁에 있어주’가 주는 청순함과 보호본능을 자극하게 되는 가련함이 크게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무대 뒤의 이수미는

치마만 둘렀지 행동이나 씀씀이는 완전한 남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노래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공연해 버릴때는 아찔한 ‘겁탈미수 사건’도 많았다.
1975년 경북 구미 공연 때 술취한 손님이 이수미 방에 잠입해 난동을 부렸고 이듬해 1976년 울산공연을 마친뒤에 부산 태화관광호텔에

묵었을 때도 웬 남자가 급습했다. 숙소인 6층까지 찾아온 그 치한이 하도 거칠게 공격해오는 바람에 이수미는 다급해서 그곳에서

뛰어내릴 각오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때 아래층에 자고 있던 동료가수 ‘잘 있습니다’의 이현, 배성 등이 올라와

그를 내쫓아서 겨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말해주듯 이수미는 여러 스캔들로 사생활은 불행했던 편이다. 아마 그의 사적(私的)인 이미지가 잘 보호됐더라면

더 많은 히트곡을 냈을지도 모른다. 전성기가 훨씬 지난 87년 그가 김태랑씨에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정말이지 수미라는 이름이 좋지 않나 봐요. 영화배우 오수미 언니도 평탄하지 못하잖아요? 이름부터 자꾸 걸려요.

”(오수미는 얼마 후 사망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그럼 김수미씨는?”(그 때 김수미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일용 할머니 역으로 절정의 인기를 과시하였다)
“하긴 김수미씨가 잘 되면서 나도 속이 좀 풀렸어요. 이제부터는 나아지겠지요.”
이수미의 사례는 당시 연예인들이 악성 루머나 스캔들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말해준다. 신문에 연애설 밀애설 등이 보도되면 치명타라도

맞은 듯 ‘도저히 낯을 볼 면목이 없어서’ ‘두려워서’ 약속된 공연마저 나오지 못하게 되는 가수들도 있었다. 지금의 연예인들은 웬만한

메가톤급 스캔들에도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것을 도리어 자신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술로도 활용한다.

어찌 보면 근래 가요계의 풍경이 한마디로 ‘순수의 상실’은 아닐까?

-재떨이에 맞은 하춘화-
이미자에 이은 1970년대 트로트의 별 하춘화는 ‘운 좋은 가수’였다. 1972년 12월 2일 연예계의 대사건 서울 시민회관 화재가 있었다.

본인의 말대로 뒷문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1976년 이리 폭발 참사사건 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처럼 공연중이던

그를 코미디언 이주일이 200m를 등에 업고 달려나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이주일은 훗날 “만약 그때 내가 업고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하춘화는 천장의 대들보가 떨어져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명동의 야간업소 ‘라데빵스’에서 노래부르던 도중 취객이 던진 유리 재떨이에 발을 맞아 닷새나 출연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사회자 최성일씨는 이 사건도 만약 그가 다른 곳을 맞았더라면 치명적일 뻔했다고 한 상태라면서 “하춘화는 유독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당했고 모두 불행 중 다행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가수”라고 말했다.
하춘화는 어릴 때 하도 노래를 잘해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무룡의 혼을 제외한 일로도 유명하였다. 심지어 최무룡 리사이틀을

회고한 것이라면서 지금도 쇼 관계자들 전부가 ‘딱부리(개구리눈이라서 붙은 별명) 하춘화’를 기억할 정도. 쇼 무대에 입문한

꼬마가수 하춘화의 노래를 듣고 홀려버린 최무룡은 공연장에 도착한 이유라면 어김없이 하춘화를 붙잡고 노래를 시켰고,

“햐! 고놈 참 신들린 것처럼 잘 부르네!”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것이다고 한다.
부산 공연의 단골숙소이면서 ‘이 집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은 1960·70년대 스타가 아니었다’는 ‘남이엄마집’에 여장을 풀면,

대부분 한잠 자거나 목욕을 했지만 최무룡은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하춘화를 무릎에 앉혀놓고 깜찍한 어린애의 노래를 감상하곤 하였다.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이 남 보기에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훗날 하춘화의 출세를 가장 먼저 인도한 사람은 다름아니라

최무룡이었던 셈이다(그러고 보면 옛날 어른들은 애들한테 노래나 트위스트 춤을 시킬 수 있는 것을 정말 좋아했던 것이다).

또한 하춘화는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가장 좋아했던 가수로도 유명하다.

-3시간에 소주 20병 마신 조용필-
무대 뒤쪽에서의 조용필은 워낙 분주했던 탓인지 시간만 나면 드러누워 잠을 청하였다. 물론 깨어나면 술이었다.

‘눈감으면 잠, 눈뜨면 술’은 그의 유명한 생활방식이었다. 다시 술 얘기지만 술은 꼭 소주, 안주는 김치찌개, 술집은 포장마차였다

(나중에는 당연히 양주, 과일, 고급스러운술집으로 바뀌었겠지만).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오로지 남의 얘기를 진지해질 수 있게 경청했다.

언젠가 만난 한 연예기자의 조용필 인간론.
“그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가슴에 깊이 보관한 인물이다!”
조용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당장 이주일이다.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최봉호 사장)

소속이기도 했지만 ‘인간적 온도’가 서로 맞는 사람들이었다. 인기 위세 그리고 나서 수입에 있어 쌍벽이기도 했고…

당연히 가까운 사이였고 그러므로 서로 툭탁툭탁 잘 다투기도 했다.
둘이 동시에 술을 마시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이주일이 먼저 “용필아! 니가 스타냐?”고 시비를 걸면

조용필은 “그럼 형님은 스탑니까?” 하고 꼬치꼬치 응수하며 대드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니, 이 자식이?” “아무리 형이지만 말야!”

하며 제법 살벌한 말다툼으로 번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날 술이 깨면 마치 짜고 한 듯 “우리가 싸웠어?” 하고 ‘끊긴 필름’을 부정한다.

이 정도면 숙명의 동반자라 하겠지만 한 사람이 가수고 한 사람이 코미디언이었기 망정이지 만약 분야가 같았더라면

두 사람은 아마 대권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하다면 무조건 배우려는 열의, 상상을 초월하게 되는 무대 완벽주의로 공연 관계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게 되는

프로기질, “무대에서 노래하는 중에쓰러져 죽는 게 소원”이라는 진정성은 조용필을 논해 버릴때 빼놓아선 안 될지도 모를 요소들이다.

그런 것들이 50세가 넘은 지금도 공연만 한 상태라면 유료티켓 판매율 90%를 상회하게 되는 유일한 국내 가수라는 위치를 낳은

밑거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조용필이 가요의 방송시대를 열면서 극장 쇼와 리사이틀 시대는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났다. 이곳에서 활동했던 음반 제작자와

매니저들도 1980년대 들어서는 KBS와 MBC 방송국으로 주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음악 흐름의 중심이 방송으로 이동한 상태라면서,

다시 말해 가요가 산업화한 것이라면서 가요계는 그 시절의 인간적 온기(溫氣)를 상실하였다.

누구 말대로 지금은 ‘인간적 예술인’은 간 데 없고 오로지 ‘스타’만 존재한다.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1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2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3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4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5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6


 -가요 100년사 힛트 메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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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 경 새 재=
글쓴이 : 문경새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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